한식이야기 1 - 평양냉면 한식이야기

예전에 아버지와 주말마다 대중 목욕탕에 가곤 했었다. 빌딩 2층에 있는 목욕탕이었는데, 목욕을 마치면 항상 1층에 있는 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다. 그 냉면의 맛은 지금도 생생하다. 살얼음이 떠있는 맑은 육수, 꾸미로 올라간 편육, 아삭아삭한 배. 면은 적당히 탄력이 있는 밝은 회색이었는데 질기지 않아서 이로 끊을 수 있었고, 입에 넣고 씹으면 희미한 곡물의 향기가 났었다. 전형적인 평양 냉면이었다. 나는 이 평양냉면을 아주 좋아했다. 목욕탕에 가면 항상 빨리 목욕을 끝내고 냉면을 먹을 생각부터 했다.

지금은 평양 냉면이 좀 드물다. 아무데서나 먹기는 어렵다. 게다가 사람들은 대체로 ‘냉면’하면 면이 가늘고 질기며 새콤한 맛이 강한 함흥 냉면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일반 고깃집에서 냉면을 시키면 그런 냉면이 나오기 일쑤다. 이것은 냉면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이 안된 탓이다. 마치 냉면은 그냥 한 가지 종류이고, 그냥 비빔냉면, 물냉면의 차이만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평양 냉면은 이제 일부러 찾아먹는 애호가들만 먹는다.
 

평양 냉면은 일단 면이 질기지 않다. 메밀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율이야 가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이로 쉽게 끊을 수 있을 정도의 강도다. 그래서 딱히 가위로 자를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메밀면과는 다르게 적당한 탄력이 있는, 독특한 식감을 가지고 있다. 면발에 약간 두께도 있으며 면에서 특유의 풍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평양이 자리잡은 평안도는 지형이 거친 북쪽 지역에서 그나마 평야가 있는 지역이다. 서늘한 곳에서 잘 자라는 메밀을 재배하기 알맞은 환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면발에 메밀이 많이 쓰였다. 산이 많은 탓에 면발에 감자전분을 주로 사용했던 함흥식과는 다르다. 함흥식 면의 탄력은 감자 전분 때문이다.

평양냉면의 또다른 특징은 육수의 맛이다. 새콤달콤한 함흥냉면에 비교하면 밍숭맹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맛이 슴슴하다. 사실 그게 본래 냉면 맛의 묘미다.

원래 북쪽 음식은 간이 약한 편이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남도 지방처럼 보존을 위해 소금간을 강하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김치만 봐도 안다. 젓갈을 잔뜩 넣어서 깊고 화려한 맛이 나는 김치가 갓김치나 묵은지 같은 남도 김치라면, 담박하고 맑은 맛의 동치미가 북쪽 지방의 대표적인 김치다. 냉면 육수엔 바로 이 동치미가 들어간다. 고기를 우린 국물과 동치미를 섞은게 냉면 육수다.

그렇다면 같은 북쪽 유래의 음식인 함흥냉면이 새콤달콤한 이유? 글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함흥 냉면은 회냉면과 같은 비빔 냉면이 발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매콤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이 냉면의 베이스가 되어, 그 감각이 물냉면에도 차츰 적용된 것이 아닐지.


냉면의 육수엔 본래 꿩고기 우린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도 꿩이 예전엔 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것이 근래 들어오면서 재료가 제각각으로 변했는데, 80년대 까지만 해도 돼지고기로 국물을 낸 냉면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맛이 굉장히 진했으리라. 어떤 맛일지 궁금하긴 하다.) 최근에는 대부분 쇠고기 국물로 육수를 내지만, 드물게 아직까지 꿩고기를 사용하는 집도 있다. 최근엔 육수에서 차지하는 동치미 국물의 비율이 적어진 모양이다. 오직 고기 우린 국물만을 사용하는 냉면집도 많다.


평양 냉면의 또다른 매력도 이야기 해야겠다. 냉면의 독특한 매력은 ‘차갑다는 것’이다. 물냉면처럼 ‘찬 국물과 함께 먹는 면’은 세계적으로도 드물지 싶다. 그런데 여기에 또 독특한 점이 있다. 보통 시원한 음식은 여름에 먹는게 상식이다. 그런데 냉면과 함께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명언(?)은 다른 이야길 한다. ‘냉면은 추운 겨울에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먹어야 제맛’이라는 것이다.

이건 온돌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옛 평양의 모진 어느 겨울날을 상상해보자. 그렇게 추운 날에는 방바닥에 뜨끈하게 군불을 피워 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한국의 겨울은 굉장히 건조하다. 게다가 온돌을 달궈놓으면 방안의 습기가 말라버려 입술이 바싹 마를 정도로 실내가 건조해진다. 그 말인 즉슨, 냉면이 간절하게 생각나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통사회에서는 아무 때나 얼음을 구할수도 없었을 테니, 시원한 냉면을 먹을수 있는 계절도 마침 겨울이다. 밖에는 추위가 기승인데, 군불을 피워놓은 방안에서 시원한 냉면을 먹는 기쁨이라니. 어찌보면 제대로 냉면을 즐기는 것은 굉장히 호사스러운 일인 셈이다. 단순한 미각 이상의 즐거움이다.

어려서 먹었던 평양 냉면을 생각해 본다. 뜨거운 물에서 목욕하고 나와 수분이 빠진 쪼글쪼글한 손가락으로, 후루룩 마시듯 냉면을 들이켰었다. 그러면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행복한 기분이 밀려왔다. 부드럽게 탄력있는 면발과 슴슴하게 시원한 국물의 맛. 평양 냉면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평양 냉면을 아무데서나 먹을수 없게 된 건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그 덕택에 생긴 더 좋은 효과도 있다. 이제 평양 냉면은 고깃집에서 서브 메뉴로 나오지 않고, 평양냉면 전문점에서만 먹을수 있는 음식이 되었기 때문에 제법 퀄리티가 높아졌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먹는 재미도 생겼다. ‘을밀대’,‘을지면옥’,'평양면옥',‘우래옥’ 등등...

하지만 나는 평양냉면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평양 냉면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더 생겼으면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겨울에 따뜻한 방안에서 슴슴한 냉면을 한사발 먹고는 '이 맛이 냉면이지' 했으면 한다. 하다못해 최소한 사람들이 ‘냉면’이라는 이름에서 고깃집 후식으로 주는 그것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덧붙임. 냉면집의 스뎅 그릇은 제발 좀 없어졌으면! 거기엔 어떤 역사성도 의미도 없고, 시각적으로도 이상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냉면 맛까지 떨어뜨린다. 도자기 그릇으로 바꾸면 얼마나 좋은가!


덧글

  • ㅇㅅㅇ 2010/05/07 22:59 # 삭제 답글

    찬 음식을 스텐레스가 아닌 도자에 넣어 먹으면 좀 이상할 것 같은데요.. 금속성 재질이 찬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 필로테스 2010/05/08 12:02 #

    스텐레스는 그릇 자체가 차가워질뿐, 보냉성은 오히려 도자기보다 떨어집니다. 그릇보단 내용물이 차가운게 중요하죠.
    게다가 금속 젓가락이 스텐레스 그릇에 긁히는 소리도 썩 좋진 않고요, 국물을 마실때 입을 대면 미세하게 금속맛이 나기도 합니다.
    굳이 금속용기를 써야한다면 방짜 유기같은걸 사용하면 좋을것 같네요.
  • 탱구 2010/05/25 11:49 # 삭제 답글

    전 방이동에 있는 봉피양에서 평양냉면을 처음 먹게 되었는데 평양냉면의 매력이 참 오묘한것 같습니다.
    평양냉면이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방짜그릇 한가득 나오는 그 탱글탱글한 면발을 생각하자니 침이 꼴깍~하네요. 작년부터 평양냉면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이렇게 냉면 애호가분의 글을 읽으니 기쁘네요.^^
  • 필로테스 2010/05/28 13:46 #

    평양냉면은 굉장히 독특한 매력이 있는 음식이죠. 좀 더 주목을 받을만 합니다. 진가를 알아주시니 반갑습니다 ^^
  • versilov 2010/05/28 01:59 # 답글

    사진은 을밀대군요 ^^
  • 필로테스 2010/05/28 13:39 #

    정답입니다 ^^
  • 박혜연 2010/11/08 14:21 # 삭제 답글

    저도 냉면만큼은 미치도록 좋아합니다! 특히 새콤달콤한 육수가 들어가있는 냉면이면 환장할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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